구조 마사모토는 1501년 3월 28일에 가신인 시나노코지 구나이쇼유 나가모리·이시이 사에몬다이후 아리토시 등의 게이시(사무 직원)와 요후쿠슈(같은 목적을 지닌 단체) 등 20명이 안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교토를 떠나 히네노의 무헨코인 절을 거쳐 1501년 4월 1일부터 가령인 이즈미 국 히네노쇼 장원 안에 있는 이리야마다무라 오기의 조후쿠지 절에 들어갔습니다. 1496년에 마사모토와 그 아들 히사쓰네는 게이시이자 고쓰치미카도 천황의 측근이었던 가라하시 아리카즈를 구조정에서 살해하여 천황으로부터 책망을 받기도 하였고, 이 히네노쇼 하향에는 근신과 히네노쇼 지배 재건, 공가사회에서의 구조 가문의 복권이라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후 1504년 12월까지의 약 3년 8개월간 장원에서 생활하며 히네노쇼를 직무 지배했습니다. 그때 농민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보고 들은 것을 5권의 일기로 남겼습니다. 원본은 궁내청 서릉부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복제(일부)는 ‘레이크얼스터 플라자·가와사키 역사관 이즈미사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사모토코 다비히키쓰케』는 교토를 떠나 가령에서 쓰인 권문세가의 일기이며, 구조 가문 하향 시의 장원 지배나 민중 생활의 양상을 묘사한 귀중한 사료입니다. 이 일기를 통해 전국 시대(1467~1573년)의 전란·기근·약탈의 실태를 생생하게 알 수 있어, 많은 연구자가 이 일기를 자료로 전국시대의 촌락이나 사회 세상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마사모토코 다비히키쓰케』의 기록으로 전국시대의 마을에 일어난 기우제, 제례, 인질 사건, 전란, 수해·가뭄 피해, 역병, 범죄 등의 생생하고 흥미 깊은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1 기우제(청우 의식)
1501년 7월 20일, 가뭄 피해를 입은 마을은 이누나키 산 싯포류지의 승려들에게 기우제를 부탁하였습니다. 우선 히바시리 신사에서 기우제의 기도를 드리고, 3일 이내에 안 내리면 싯포류지 절의 폭포에서 기도합니다. 그래도 안 내리면 부동명왕의 불당에서 기도하고, 그래도 안 내리면 싯포류지 절의 폭포에서 사슴의 목과 같은 부정한 것을 폭포 아래로 던져버리고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7월의 기우제 때는 3일이 되지 않아서 비가 내렸기에, 구조 마사모토도 ‘다이묘진의 신기한 힘이 우리를 도왔다, 감동의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라고 서술했습니다.
8월 13일에 ‘우희의 풍류’가 개최되었을 때는 이리야마다무라의 4개의 마을이 히바시리 신사에 모여, 후나부치·쇼부무라가 하얀 비단 깃발, 오기·쓰치마루무라가 감색 깃발을 세우고 풍류를 봉납했습니다. 또한 스모도 거행되었습니다.
에피소드2 제례·학예
1501년 7월에는 화려하게 꾸미고 하야시에 맞춰 군무를 추는 풍류염불이 거행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히바시리 신사에서 봉납하기 전날에 마사모토가 있던 조후쿠지 절에 쓰치마루무라(13일), 후나부치무라(13일), 쇼부무라·오기무라(15일) 순서로 방문하여 풍류염불과 사루가쿠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다음 날인 7월 16일에는 히바시리 신사에 4개의 마을이 풍류 하야시를 봉납한 후, 사루가쿠 ‘시키산반’(오키나마이)이나 ‘우노네’도 공연하였습니다. 마사모토는 마을 사람들이 추는 춤이나 동작, 해설이 수도의 뛰어난 능자들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훌륭하여 놀랐다고 합니다.
에피소드3 인질 사건
1501년 6월 17일, 사노의 장(2와 7이 들어간 날)에 갔던 이리야마다무라의 농민이 슈고 측에게 잡혀 인질이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봉기하여 사노에 불을 질러서 슈고 측으로부터 인질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인질 중 한 명이 도망칠 때 왼손을 베이기는 하였지만 스스로 어떻게 무사히 도망쳐서 돌아왔습니다. 오후 6시경에 사노의 역인이 ‘오늘 일은 사타케와 벳토가 멋대로 벌인 일이라 사노와는 관계가 없다’라는 연락을 하였다고 적혀있습니다. 반 슈고 세력이던 이리야마다무라에 대한 협박이었습니다.
에피소드4 전란
1501년 8월 23일 슈고의 하급 무사인 히네노 미쓰모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어와서 히네노무라는 동요하였고, 마사모토의 가신인 아오키 도사뉴도, 이시이 아리토시가 달려가 무헨코인 절에 묵게 되었습니다. 8월 28일, 이리야마다무라에서도 엔만지 절이나 쇼부무라에서 다급한 경종을 울려 마을 사람들에게 위급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슈고의 하급 무사인 히네노 씨가 히네노무라 동쪽에 난입하여 히네노무라 동쪽의 반토와 와키뱌쿠쇼(가난한 농부)를 생포하였습니다. 쓰치마루 주민들과 접전이 벌어졌지만, 주민들끼리 상대하기엔 힘이 부족해서 마사모토에게 아뢰자, 아오키 뉴도, 이시이 아리토시가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퇴거하여 슈고의 방역사가 있었던 사노에 활 싸움을 걸었습니다. 이 무렵의 구조 마사모토는 가신이 죽으면 히네노쇼는 슈고에게 패배하리라 생각하고, ‘조후쿠지 절에 불을 붙이고 자결할 생각이라는 편지를 교토에 있는 아들 관백 구조 히사쓰네와 호소카와 스미유키에게 전달해달라고, 가신인 나가호 데라테루에게 부탁하겠다’라는 각오를 했습니다.
9월 5일에는 다시 슈고의 세력이 난입해서 쓰치마루무라 부근의 마을 사람들은 재산을 옮기느라 그 소와 말들로 거리가 매우 혼잡해졌습니다. 마사모토의 봉행 이시이 아리토시와 이리야마다무라 4개의 마을의 군병들은 산에 올라가 대기하였지만, 결국 슈고가 마을까지 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9월 23일 슈고 측의 하급 무사인 히네노 미쓰모리, 아야이·혼야마·오타가 이끄는 천여 명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에 반해 시나노코지 나가모리·이시이 아리토시들이 이끄는 이리야마다무라 주민들은 고작 200여 명 남짓으로 대항하였습니다. 3시간에 걸친 접전 끝에 퇴각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슈고 측은 무구를 몸에 걸치고 있었지만, 이쪽은 다들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구미노고(근린 동맹)로 구마토리와 가미노고에도 연락하였습니다.
1501년 8~9월, 네고로 측의 낭인 사토 총병위(히사노부)의 군세가 사노 시장이나 히네노 서쪽의 쓰지하나를 깡그리 태워버리고, 쓰지마루에 침입해서 슈고 측의 군세와 충돌해 격파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산 위의 진을 거점으로 삼아 이즈미 남쪽을 공격하였고, 불탄 히네노 동쪽의 백성들은 산림으로 도망쳤습니다.
에피소드 5 수해
1502년 8월 27일부터 히네노쇼에 내린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려 결국 폭우와 홍수가 되어 9월 1일, 쓰치마루·쇼부무라의 논으로 용수를 끌어오던 송수관이 하류에 있던 나가타키쇼까지 흘러버렸습니다. 구조 가문의 봉행 시나노코지 나가모리가 지휘하여 이리야마다무라의 4개의 마을 및 히네노 동서쪽 마을 사람들 늙은이, 젊은이 구분 없이 약 400명 남짓이 이것을 되돌려보려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추가로 가미노고의 3개의 마을(가미무라·나카무라·시모무라)과 나가타키쇼 마을 사람들이 협력했습니다. 그때 가미노고는 술까지 대접해줬다고 합니다. 이렇게 히네노쇼 안팎의 민중이 협력하여 쓰치마루의 송수관을 쓰치마루로 되돌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또한 쇼부무라의 송수관도 오이세키다이묘진 앞의 가시이가와 강에 둬서 다음 봄까지 끌어올릴지 새로 만들지를 상담했습니다.
에피소드 6 가뭄 피해
1503년 7월 10일, 이 해에는 이상할정도로 가뭄이 심각해서 농민들은 처자식까지 끌어내서 하천에 조금 있는 물을 통으로 퍼서 논을 적셨다고 합니다. 올벼의 이삭은 하얀색이었고, 잎은 비틀려서 붉은색이 되어버렸습니다.
7월 25일에는 마을 내의 마실 물이 바닥을 보이고, 하천의 흐름도 전부 멎어버려 마을 사람들은 마사모토가 지내던 조후쿠지 절의 우물에 물을 뜨러 올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에피소드 7 전염병
1503년 4월 5일, 전염병이 유행하여 사망자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기무라 엔만지 절에서 반야심경 만 권을 강독하였습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다이니치도 불당에서 하치오지샤 신사까지 만 번의 참배를 드리며 전염병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1504년 5월에는 사노무라의 바닷가(사노우라)에서 전염병으로 마을 사람 전원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피소드 8 범죄
1504년 2월 16일, 무녀 일가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오기무라반토 와카자키 우콘과 후나부치반토가 보고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기근 때문에 식량이 없어져서 산에 자생하는 고사리를 따서 하룻밤 강물에 두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에 그것을 훔치려는 자가 나타나서 보초를 서며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 도둑은 아자마쓰시타에 있는 히바시리 신사 무녀의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그곳에는 무녀와 두 아들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잡아와 가족 3명을 모두 처형했습니다. 이런 사건은 종종 발생했다고 합니다. 마사모토는 무녀 일가가 한 짓은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이며, 자업자득이라 어쩔 수 없다고 나무아미타불이라며 염불을 외웠습니다.
에피소드 A
1504년 5월 1일, 마사모토는 나가호 데라테루와 다케하라 사다오에게 지시하여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리야마다무라의 쌀·밀 등을 다른 마을의 상인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영락통보·홍무통보(중국 명나라 시대의 통화)도 에리제니(악화를 골라냄) 하도록 하였습니다.
에피소드 B
1503년 1월 2일, 그날은 싯포류지 절의 수정회였는데 폭설이 내려 별당(직함)인 네고로지 절의 신푸쿠지 신카이는 올 수 없었습니다. 연시에 조후쿠지 절의 마사모토로부터 마을에 문서를 읽어주는 ‘깃쇼’, 장수를 기원하며 1월 1일부터 3일간 가가미모치·무·오이·멧돼지고기·사슴고기·은어 절임 등을 먹는 ‘하가타메’를 하였습니다.
에피소드 C
1503년 1월 4일, 조후쿠지 절·렌게지 절의 주지 스님이 녹차를 가져왔습니다. 마사모토가 술잔치를 벌이고 술을 대접했습니다. 호센안·고세키지 절(쇼부무라)·게쇼안(쇼부무라 오야 우콘의 사암)등도 왔지만 이들은 마사모토가 만나주지 않고 마사모토의 가신인 시나노코지 나가모리가 대접했습니다.
에피소드 D
1503년 1월 5일, 이리야마다무라의 공동 온천이 있어서 히네노무라의 무헨코인 절의 주지가 왔습니다. 술값으로 30푼(혹은 천)을 지참하였습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마사모토가 만나서 술을 대접했습니다. 기뻐서 부채 3개를 시나노코지 나가모리에게 하사하였습니다.
1월 6일은 히네노무라의 반토, 목수도 인사하러 와서 술을 대접하고, 나가모리에게 부채 하나를 보냈습니다. 또한 8일에는 렌게지 절 주지가 술 한 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에피소드 E
1502년 8월 29일, 히네노쇼 장원의 차 염색 방법이 적혀있습니다. 황차, 청차, 당차 3가지 색의 염색 방법이 있는데, 재료에 히네노무라 명물인 소귀나무 열매나 차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후나부치무라나 쇼부무라 등에서는 40여 명으로 조직된 곤바이야가 있어, 감색에 사용하는 잿물로 이용했습니다.
에피소드 F
『마사모토코 다비히키쓰케』 갑권의 표지 뒤에 폐결핵과 학질(말라리아 등의 열병)의 특효약의 효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도장(일본 요리 중 하나)·지렁이의 오줌·머리에 사는 이를 넣은 흑갈색 액체·올빼미 검은 구이 등의 생물이나 향의 연기 등을 가공·조합하지 말고 복용할 것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에피소드 G
이리야마다무라에 사노·이하라·가미노고·구마토리·기지마·신게 마을들이 소와 말이나 재물을 맡겼습니다. 이것을 마을의 ‘예물’이나 ‘은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에피소드 H
이리야마다무라의 마을 사람들은 슈고 측이나 장원 영주 등 적의 세력의 내습에 대비하여 주변 산을 거점으로 ‘산에 들어가서’, ‘산에 틀어박혀’, ‘조그마한 집에 들어가고’, 도산(집 주위에 ‘가는 대를 엮어두기’)을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거점으로 삼았던 산이 쓰치마루·아메야마 성 골짜기 근처 등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